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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메이드 인 부산 경쟁부문의 출품 규정을 확대·개편했습니다. 장편영화의 경우 연출자의 첫 작품에 한정한 기존 규정에서 부산지역 창작자가 만든 모든 장편영화로 그 대상을 넓혔습니다. 이 변화가 부산독립영화의 저변 확장과 다양한 창작자의 성장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품작은 총 79편(극영화 59편, 다큐멘터리 16편, 실험영화 2편, 애니메이션 2편)으로. 지난해 72편(극영화 48편, 다큐멘터리 18편, 실험영화 4편, 애니메이션 2편)보다 소폭 증가했습니다. 이 중 18편(극영화 12편, 다큐멘터리 4편, 실험영화 1편, 애니메이션 1편; 장편 3편, 단편 15편)을 경쟁부문에 선정했습니다.

출품작 전반을 보면, 극영화는 지난해보다 질적으로 향상되어 한층 의미 있는 논의가 기대됩니다. 다큐멘터리는 주제의식의 깊이나 형식적 측면이 아쉽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눈에 띄는 점은 사회 현상이나 구조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가족, 창작, 자아 탐색,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갈등처럼 미시적 차원에 집중된 경향은, 학교나 기관을 중심으로 한 제작 경향과 관련될 것입니다. 물론 사적인 서사도 사회적·예술적 맥락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방향으로 기울어 창작자 스스로 자신의 외연을 제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범죄, 폭력, 사회 경향을 다룬 일부 작품도 대상을 소비하는 데 그치거나, 극장에서 ‘영화’로 극장에서 공유될 가치를 고민하지 않은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성찰 없는 개인의 기록은 영화가 될 수 없습니다. 숏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치열한 사유가 동반된 미학적 진술이 필요합니다.


경쟁부문에 오른 18편은 창작자 고유의 언어와 감각을 이미 갖추었거나, 그것을 제련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 기저에는 사람과 현상에 대한 진지한 관찰, 탐구, 문제의식이 자리합니다. 이는 작품의 완성도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자기만의 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극영화는 서사를 운용함에 있어 형식을 의식해 실험적·창의적 방식을 적용한 작품이 주목받았습니다. 독자적인 톤과 세심한 구성으로 주제를 구현하려는 시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좋은 감각과 세련된 연출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작품, 대상과의 신뢰를 기반으로 그 개성과 매력을 프레임에 옮긴 작품이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일부 작품은 구성이 다소 피상적이거나 도식적입니다. 그러나 전개 과정에서 보인 의지와 잠재력을 높이 삽니다. 그리고 안전한 선택 대신 모험을 감행해, 독립영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용기와 도전을 보여준 작품에 응원하는 마음으로 경쟁부문을 구성했습니다.

2025년, 메이드 인 부산 경쟁부문이 불균질한 부산독립영화의 현재를 직시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장소, 나아가 한국독립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플랫폼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실천이 곧 부산독립영화의 자산이기에 출품한 모든 창작자 여러분께 격려를 보냅니다. 이번 출품이 다음 작품을 향한 새로운 질문의 시작, 미지의 영역으로 가는 동력이 되기를 바라며, 극장에서 뵙겠습니다.


예심위원 김지연 여설란 함윤정


스펙트럼 부산은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창작자들의 다양한 작품 세계와 흐름을 조망하는 자리다. 최근 1년 사이 제작된 현재 부산독립영화의 주요한 흐름을 살피는 스펙트럼 부산-나우와 부산독립영화의 빛나는 성취를 되새기는 스펙트럼부산-리와인드로 구성된다.

스펙트럼 부산-나우의 올해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온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의 이름이 있다. 박배일의 카메라는 해외 체류 중에도 꺼지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서 다큐멘터리 <부력>(2025)이 되었다. 산복도로에서 시작된 김지곤의 할매 연작은 <할매>(2011), <할매-시멘트정원>(2012), <월간-할매>(2013), <할매-서랍>(2015)을 지나 <망양중복>(2025)에 이르렀다. 할매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다복한 자손들과 어울려 김지곤은 사라져가는 것과 그 자리를 채운 개발의 풍경을 수집한다.
생활의 그릇인 옹기를 만드는 기술과 장인들도 번영한 시절을 지난 듯하지만, 기술은 이제 계승해야 할 전통이자 문화유산이 되었다. 주인된 이의 살뜰한 손길 안 닿은 곳 없는 작업장, 다음 과정을 기다리며 정연히 쌓인 그릇들, 친구이자 동료를 기억하며 흙 빚던 손으로 시를 쓰는 마음 앞에 노동과 예술의 경계를 생각해본다(<옹기와 장인>(2025)(오민욱)). 박준범은 <디렉터스 컷>(2014) 이후 오래간만에 신작 <우리의 계절은 흘러가고>(2025)를 내놓았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을 포착하는 데 능한 단편 극영화다.
김종한은 2025 부산독립영화 후반제작지원 프로그램 프로젝트 인디부산을 통해 <눈 내리는 봄날>을 완성했다. 인물과 스태프 구성은 여전히 단출하나 두 배우가 참여해 그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자막이 없다. 특유의 말투는 여전히 하나의 인상을 만든다. 올해 부산 인터시티 레지던시 영화제작사업으로 필리핀 퀘존시티에 파견된 이시오의 단편신작 <홈커밍>(2025)은, 여름의 무성한 생명력과 도시의 활기 속에서 격렬한 드라마 대신 인물의 감정을 가만히 살피고 있다.
누군가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건 그동안 보아온 영화와 나와 친구들의 유희다. <자유사진>(2025) 얘기다. 건물과 이어져 서로 마주볼 수 있는 육교의 구조에서 권용진은 <퐁네프의 연인들>(1991)을 떠올린 것 같다. 장소가 마음에 들어 즉흥적으로 만들었다는 이 작품은, 한눈에도 친구들이 분명한 비전문 배우들이 익숙한 자의 카메라 앞이라서인지 천연한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레오 까락스의 영화에서처럼 춤을 추거나 달리는 건 인물들이 아니라 카메라다.
김경현의 단편 다큐멘터리 <한퇴골>(2025)은 불편한 피붙이들과 모이는 현대의 명절을 생각한다. 그들의 관계가 스타일로 반영되어 어머니의 형제들은 카메라에 곁을 주지 않는다. 탐사추적 프로그램이 증인을 보호하는 구도가 그렇듯 먼 발치, 혹은 뒷모습, 얼굴 아래의 신체 일부 정도나 허락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숏을 차지하는 건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들의 사진, 목소리, 강아지, 세간살이 같은 것들이다. 어른들의 일이라 나서지 않는 대신 자막으로 속내를 전하고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곰살맞은 아들과 그래도 늘 쾌활한 어머니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김경현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스펙트럼 부산-리와인드는 시간의 흐름이 반드시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다. 사람살이와 가족은 창작자들의 영원한 테마다. 각기 다른 형식으로 가족, 다른 말로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단편 세 편을 모았다. 일찍이 배종대라는 극영화 연출자의 가능성을 예견케 했던 <계절>(2009)은 섬세하게 직조된 인물의 감정이 놀랍다. 유쾌한 장르의 방식으로 가족을 호명하는 김진태의 <대회전>(2012)은, 그 소재가 최신작 <결혼, 하겠나?>까지 어떻게 변주되며 이어지는지 확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윤지수의 <부자>(2014)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이자 손녀이기에 가능한 자리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다.
서로 다른 시간과 형식, 그리고 믿음직한 영화의 태도를 이곳에서 생각하며 부산독립영화의 스펙트럼을 가늠해보기를 바란다.

김지연


언제든 다시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인사나 안부에 작별과 그리움이 드리우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큰 상실의 정서와 함께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경험이 된다. 스물일곱 번째 부산독립영화제를 준비하며, 조금 일찍 먼 곳으로 떠난 두 사람을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공간나라를 중심으로 작은 영화의 가치를 실천해왔던, 김미라 또는 김라로 불리던 사람. 미소와 긍정 그 순수를 잃지 않고 영화와 세상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신혜경 또는 신나리로 불리던 사람. 언제든 부산독립영화제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 김라 님과 신나리 님, 두 사람이 남긴 소중한 가치와 온기 묻은 추억은 상실보다는 감사함과 그리움 사이 어디 즈음에서 이곳에 남은 우리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 머나먼 그곳에서는 평온함에 이르렀길 마음 깊이 빌어본다.
오민욱


평범함 앞에 서서

영화가 삶과 세계에 대한 반응이라면, 안건형은 치열한 성찰을 통과해 구축한 자신의 형식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다. 재현 혹은 기록이라는 영화 매체에 대한 이분법적 규정은 그의 카메라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 경계를 다시 그려내려는 시도의 연속이 안건형의 영화이력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의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사소한 일상으로부터다. 각자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들의 일상을 수집해 구조화한 <일과 날>(2025), 그 먼 기원에는 ‘<고양이가 있었다>(2008)’. 일찍이 안건형은 신선장 횟집,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카메라로 관찰했다. 바다의 윤슬, 여름 오후의 적요함, 직사광선, 앞마당에 물 뿌리는 일마저도 영화에서는 스펙터클이 된다. 다큐멘터리의 스타일로 인물과 상황을 세밀하게 포착했지만, <고양이가 있었다>는 극영화다. 서로 닮았거나 순도 높은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들 대부분은 비전문배우이고 카메라는 인물들의 동선과 대사를 따라 사전에 준비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인물들은 명백히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쑥스러워 카메라와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주저하는 장면을 보면, 영화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같다. 혹은 멀찍이 물러난 자리에 괴어놓은 카메라가 담소를 듣고 있을 때, 최소한의 상황만이 부여 되었거나 그마저도 없었던 건 아닌지 하는 추정은 무리지 않다. 불확실성 앞에 놓인 영화가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사유는 어디서나 무엇으로나 넓고 깊게 뻗어나갈 수 있다. 영화예술에 대해 카메라로 자유롭게 써내려간 에세이 <동굴 밖으로>(2011)는 일상에 스민 인식 안에서 예술의 원칙을 고민하는 안건형이 그려낸 매혹적인 의식의 지도다. 길고양이를 대상으로 삼은 그의 카메라는 삼각대에 고정되지 못하고 대상을 따라 흔들리고, 기다려주지 않는 고양이보다 늘 한발 늦거나 초점을 놓친다. 그렇게 카메라가 쓰레기장과 주차장, 화단을 배회하는 동안, 안건형은 자신의 주변을 다시 발견하고, 이 여정에서 예술이 견지할 태도를 깨닫는다. 감정을 끌어낼 쉬운 방법을 버릴 것. 대상을 존중할 것. 본다는 행위의 불완전함을 잊지 않을 것. 이는 창작자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다. 그렇게 안건형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파편을 모아 보편의 윤리를 획득한다.
과거를 어떻게 현재로 불러들일 수 있는가? 안건형이 내놓은 방법론은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2014)에 있다. 남아있는 문헌들을 바탕으로 프레임 내부를 구성한 문장들이 책의 한 페이지처럼 배열되고 각주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책이기에 사운드는 없다. 그의 표현은 ‘논문’,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림책에 가깝겠고, 영화형식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 이미지들은 몽타주가 될 것이다. 홍제천과 세검정,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복원된 과거가 아니라 사람들의 관념이 복원된 것이라는 날카로운 통찰이 빛난다. 다양한 자료를 배치해 현재의 이미지들 안에서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작업은 우리의 사고를 환기한다.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작업이 아카이브 푸티지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인을 관두는 법>(2018)일 것이다. 정치·사회·역사의 현상에 대한 예민한 분석을 기반으로 방대한 문헌들로 구성한 이 페이크 다큐멘터리에서, 아카이브란 단순한 과거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반영하며, 영화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예술가의 실천이자 성명(聲明)이다.

안건형의 영화는 세계를 향한 태도와 사유의 방식이다. 끊임없는 탐색을 통해 그는 관습을 의심하고, 이미지의 힘과 한계를 실험하며, 형식과 사유를 동시에 전진시키는 드문 작업을 보여준다. 이 과정은 한국독립영화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영화가 할 수 있는 질문과 성취의 범위를 타진하는 장소가 된다. 한국독립영화에는 안건형이 있다.

김지연


부산독립영화제의 로컬 투 로컬 섹션은 부산 외 지역에서 만들어졌지만, 부산의 관객들에게도 꼭 소개하고 싶은 독립영화들을 매년 소개하고 있다. 올해 이곳에선 3편의 장편 영화와 6편의 단편 영화를 상영한다. 3편의 장편 영화는 우리의 기분을 무척 쾌활하게도, 무척 우울하게도 또한 관객의 머리를 무척 복잡하게 만들기도 것이다. 백종관 감독의 <시련과 입문>은 감독이 그간 꾸준히 보여준 실험영화의 테두리 안에서 영화의 우연성과 상상력을 환기하게 만들며 관객의 머릿속을 휘저을 작품이다. <지난 여름>으로 지난해 부산독립영화제를 처음 찾았던 최승우 감독의 <겨울날들>은 농촌 지역의 정경을 담았던 전작과 달리 서울의 냉랭한 겨울을 담아내며 강한 정서적 대구를 이룬다. 반가운 이름이 또 있다. <그래도, 화이팅!> 등으로 꾸준히 부산독립영화제를 방문했던 김준석 감독은 이번에도 아주 소박하되 사랑스러운 영화 <그래도, 사랑해>로 다시 로컬 투 로컬에 방문한다.

단편 영화 중에서도 다시 만나는 이름이 있다. 2023년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를 선보였던 전준혁 감독의 <숨소리와 속삭임>은 고요하게 특정 공간을 응시하는 감독의 인장이 역시나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이지윤 감독의 <나무가 흔들릴 때 마음이 찾아온다>는 흔히 ‘지역’으로 인식되지 않는 서울 내 정릉골의 재개발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로서, 수도권 역시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 온 원주민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해야 한단 의미를 건네준다. 올해 로컬 투 로컬 단편 영화 목록의 특기할 부분은 대구, 대전, 전북, 인천의 독립영화협회가 추천해 준 4편의 영화가 골고루 상영된단 점이다. 대구에서 만들어진 박유진, 진현정 감독의 <커뮤니티>는 지역 문화를 지키거나 그곳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지역 영화의 의의를 특히나 더하는 작품이다. 대전 지역의 <알다시피>(장가영 감독), 전북 지역의 <God complex>(김은성 감독), 인천 지역의 <봄매미>(강민아 감독)는 여러 장르의 색채를 오가며 지역, 단편 영화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예시들이다.

로컬 투 로컬 섹션의 가장 큰 즐거움은, 같은 시대에 만들어져 특정한 조건과 제약 없이 모인 각지의 독립영화가 과연 어떠한 이야기와 형식을 보여주는지 연결하는 일에 있을 것이다. <시련과 입문>에 나오는 ‘아포페니아’라는 단어의 뜻처럼, 우리는 수많은 영화를 보며 그 안의 인물과 사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의중과 감정을 유추하고 특정한 의미로 꾸려 나간다. 즉 메이드 인 부산, 스펙트럼 부산 섹션이 작금 부산 영화의 의의를 포착하는 기회라면 로컬 투 로컬 섹션에선 동시대 독립영화의 맥락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관객 각자의 사유가 탄생하겠지만, 필자의 사견을 살짝 덧대고도 싶다. 올해의 상영작들은 그간 통상적으로 여겨져 왔던 독립영화의 만듦새나 틀에 대하여 각자만의 의문을 발현하거나, 그 의문의 시간을 통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이룩한 이들의 작품인 듯하다. 이러한 필자의 의견이 어떠한 아포페니아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올해도 이어지는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직접 확인해 주길 바란다.

이우빈

사태의 조각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윤석열은 2024년 12월 3일 22시 23분경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대통령으로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호소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이 담화는 국가긴급권을 남용한 사례로 대한민국 전역에 위헌과 위법의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국회 등 헌법기관의 무력화를 시도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약 330분 동안의 괴이한 사태는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의 사망 직후 선포된 계엄 이래 45년 만에 선포된 비상계엄이자, 1972년 10월 유신 이후 52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이었다. 이후 내란수괴 윤석열의 이야기는 탄핵과 파면, 그리고 체포와 구속으로 막을 내린다. 다시 내란수괴의 시간으로 돌아 가본다. 정확하게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시작하는 윤석열의 말이다. 윤석열은 국민을 존경하지 않았고, 대통령의 자격도 없었으며, 호소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 사태는 윤석열의 말보다는 늦은 밤의 평온을 깨뜨리고 디스플레이 장치의 화면 위로 등장해 술에 취한 듯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씩씩거리는 그의 행동으로 각인되어 있다. 기괴함이 감도는 이 담화는 “사회 집단 내에서 권력과 이익을 조정하고, 질서와 정책을 실현하는 행위와 태도”를 의미하는 ‘정치적’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질서유지, 타협과 비폭력, 인간에 대한 이해와도 거리가 멀다. 가장 ‘정치적’이었어야 할 이의 저열한 말과 행동은 대한민국을 괴이한 공포에 빠뜨렸다. 올해 포럼 인디크라시에서는 아직은 식지 않은 이 사태의 조각을 통해 정치적 국면과 사태,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사태의 조각을 다루는 인간의 행위는 영화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재설정하며 어떤 정치적 현실을 구성해내는 것일까? 이 섹션에서 소개하는 일곱 작품 속 인간은 탈주범, 유흥업소 종사자, 예술가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저마다 속해있거나 처하게 된 정치적 국면에서 특정 행위로 마주한 사태를 숙명과 일상을 오가는 가운데 거울처럼 비춰낸다. 여기서 사태란 도망치고 추격당하는 일, 웃음을 팔며 자신의 마음속 그늘을 만드는 일, 관념을 재현해 내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대상을 포착하는 장면의 외연과 이미지 바깥의 세계, 그리고 카메라 뒤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의 선택 역시 하나의 사태이자 국면이 된다.

오민욱